2006년 07월 25일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3
《孫子兵法》 『第一篇 兵者』3
地者, 遠近.險易.廣狹.死生也. 지(地)라고 함은 멀고 가까움, 험하고 평탄함, 넓고 좁음, 사지인가 생지인가를 말합니다. 군사(軍事)의 세 번째 고려 요소로서 손자는 지리적 환경을 꼽고 있다. 거리가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지형과 산세는 어느 정도 험하고 평탄한지, 넓은 땅인지 협소한 땅인지, 그리고 취해도 되는 땅인지, 가서는 안 되는 곳인지 등등을 고려하여 군사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원근(遠近), 험이(險易), 광협(廣狹)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사생(死生)의 의미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여기서의 사생은 사지(死地)와 생지(生地)를 말하는 것으로, 사지(死地)는 군사행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군대를 통과시키거나, 주둔시킬 수 없는 지역을 군사(軍事)의 무대로 삼으면 참극을 피할 수 없다. 지리적 이유만으로도 이기기 힘든 땅은 고대로부터 병가(兵家)를 괴롭힌 문제였으며, 지리적 환경에 대한 무지나 대비의 소홀 때문에 비참한 파국을 맞이한 군대는 역사에 드물지 않았다.
지자, 원근.험이.광협.사생야.

↑아토스곶과 크세륵세스 운하의 위치
앞에서 살펴본 페르시아 전쟁에서 다리우스 1세의 제1차 그리스 원정이 실패한 것은 페르시아 함대가 아토스곶 앞바다의 거친 풍랑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전선(戰船)은 노를 저어 항해했기 때문에 언제나 육지를 바라보면서 해안을 따라 항해를 해야만 했다. 난바다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2차 원정 때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한 것도 에게해를 바로 가로질러 마라톤에 상륙했기 때문에 동원한 군선이 대형선박에 한정되어 소수 정예의 원정군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아테네군과의 전투시에는 병력의 수에서 그리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3차 원정에서는 1차 원정과 2차 원정의 교훈을 모두 살려서 대병력을 동원한 원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역시 당시의 함대에게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인 아토스곶 앞바다의 통과가 문제였다. 아토스곶 앞바다에는 육지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해수면 아래에 위험한 암초들이 있고, 해류가 급하고 풍랑이 거칠어서 숙련된 뱃사람들도 지나가기를 꺼리는 바다였다. 군대가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목에 이러한 사지(死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페르시아군은 함대가 풍랑에 소멸해 버리자 철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세륵세스의 제3차 그리스 원정 때는 이 사지(死地)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크세륵세스 운하이다. 뾰족한 칼날처럼 바다를 향해 돌출한 아토스 반도의 뿌리 쪽을 절단해서 운하를 파버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지 않고 크세륵세스 운하를 통과하여 바로 그리스 해안을 따라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요서의 대소택지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국력을 총동원하고도 번번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까닭은 바로 고구려라는 나라가 너무나 먼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중국의 동북 국경인 산해관(山海關)까지가 대충 700km이며, 거기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까지가 또한 그 정도 거리가 된다. 중국과 고구려 사이는 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중간에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가 있었다. 지금 발해만의 북쪽인 요서지역의 대소택지가 그것이다. 요동만으로 흘러드는 요하의 하류지역은 수계가 복잡하고 광대한 땅이 갈대 숲에 덮힌 습지이며 곳곳이 늪지대였다. 이 요서의 소택지를 우회하려면 그만큼 행군로와 보급로가 길어졌다. 이곳을 통과해서 요하를 건너면 바로 고구려의 변방 요새지대를 만나게 된다. 요하의 동안을 따라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것이다. 중국의 원정군은 일단 요하를 건너게 되면 앞은 고구려의 요새요 등뒤는 뒤돌아보기 싫은 소택지가 되는 형국이어서 단기속전으로 요새지대를 돌파하지 못하면 군대의 보급은 그야말로 지난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구려 원정의 승패는 사실 보급을 맡아줄 수군에 달려있었는데, 수나 당은 수군의 싸움에서 고구려에 이기지를 못하였다. 안시성에서 패한 당태종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요하 하류 부근에서 배를 타면 발해만을 가로질러 지금의 당산이나 천진에 가는 것은 3일이 안 걸리는 뱃길이었다. 그런데도 당태종은 요동만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군의 추격에 쫓기면서 습하고 위험한 요서의 소택지를 3개월이 걸려 통과하는 몸서리치는 패주를 해야만 했다. 이 동안에 당태종은 건강을 완전히 잃게 되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송장에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후에 나당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도 당군은 한반도에 주둔한 군대에게 보급품을 보내지 못해서 결국 신라에 졌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바로 손자가 말하는 사지(死地)이다. 그 거리는 멀고 왕래는 고통스러운 땅이었던 것이다. 군대를 보내어 정복하더라도 유지하기 어려운 땅이었다. 그래서 나당전쟁 패배 후 천년 동안 중국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지 못하였다. 중국의 한반도 원정은 당나라로서 마지막이었다가 지난 세기에 천년만에 이 땅에 중공군이 들어왔다. 역시 보급의 문제와 제해권의 상실로 이기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난 것도 천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지(死地)는 자연적인 것도 있으나 인공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임진왜란 때 출전을 재촉하는 조정의 명령에 대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내용에 '부산포는 사지(死地)여서 진공이 어렵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 왜군은 수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연전연패 당하자 관백(關伯)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모든 배를 항구에 붙들어매고 그 바깥을 판자로 둘러서 막고 육지에 포대를 설치하여 엄호하게 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바다에 나가 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의 수군은 해안을 따라 노를 저어 가다가 식사를 하거나 밤에 잠을 잘 때는 육지에 올라가야 했다. 때문에 바닷가에 면한 지원기지로부터 멀리 나갈 수가 없었다. 당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거리 내에 아군의 지배 하에 있는 육지나 섬이 없으면 함대만으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경남 일대는 전부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부산포에 가까운 섬들에도 왜군이 주둔하여 진채를 세우고 있었다.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거제도를 지나서 한참을 더 동쪽으로 들어가야 부산포이다. 부산포 부근에는 배를 댈 섬도 없고, 군사를 쉬게 할 안전한 바다도 없었다. 왜 함대가 맞서 싸우러 나와주지 않는 한 강력한 육군으로 점령되어 있으며 사방의 섬들도 적의 점령하에 있는 항구 깊숙이 함대를 끌고 돌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부산포를 사지(死地)라 하여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못한다 했던 것이다. 바다 싸움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했는데, 원균 역시 수전에 우둔한 사람은 아니어서 역시 진공불가를 주청하였으나 권율에게 붙들려 곤장을 맞고 어쩔 수 없이 함대를 인솔하여 사지로 향하게 된다. 이 원균의 함대를 왜 수군은 점점 더 먼 대마도 앞바다로 유인해 나갔고, 적을 쫓다가 지친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렸지만 그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리고 쉴 곳이 없었다. 수군들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자 왜군이 점령한 거제도에 멋대로 상륙해서 물을 찾다가 도륙 당해 죽었고, 노를 너무 오래 저어 부르터진 손으로 밥을 지어먹으려고 솥을 걸다가 왜군의 총에 죄 맞아 죽었다. 상승의 조선 수군은 사지인 부산포로 들어섰다가 근처의 섬들과 육지에 사분오열 흩어져 살길을 찾다가 모조리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원균의 패전은 1차적으로 수전에 무지한 조정과 휘하의 군대를 사지로 몰아넣은 권율의 무모한 지휘에 그 책임이 있다.
손자는 《손자병법》의 첫머리에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저 병(兵)을 다스릴 때는, 거리가 얼마나 먼지, 지형이 얼마나 험한지, 땅이 어느 정도 넓은지, 그리고 들어가 살 곳인지 죽을 곳인지를 먼저 헤아리라고. 이순신 장군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사지에는 들어서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생지이고 적에게는 사지인 곳에서만 싸운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생전에 패배를 몰랐다. 역사상 뛰어난 장군들 중 비참한 말로를 맞은 사람들은 대개 말년의 교만함이 사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게 만든 때문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그러했고, 나폴레옹이 그러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러했고, 히틀러가 그러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상으로 꼽히는 제나라의 관중(管仲)도 산융(山戎) 정벌시 지리에 어둔 탓에 사지에 들어섰다가 거의 죽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물이 없는 곳에서 전군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관중이 개미가 사는 곳에는 물이 있으니 개미집을 찾으라고 명령하여 사막에서 물을 찾고,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을 때, '늙은 말은 길을 기억합니다'라고 제환공을 위로하면서 가장 나이 든 늙은 말을 앞서게 하고 그 뒤를 따라감으로써 길을 찾아나오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천하의 관중도 사지에 빠졌을 때는 실로 위험했던 것이다.
# by | 2006/07/25 15:56 | Oriental Studi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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