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25일
고대(古代)의 전쟁 10
고대(古代)의 전쟁 10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전쟁과 기원 후 6세기의 려수(麗隋) 전쟁을 보면 역사는 되풀이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처럼 주변을 정복하면서 팽창해 나가던 청년 제국이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던 소아시아(터키)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영역인 요서(遼西) 지방을 넘본 것과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도발은 고구려 쪽이 먼저 했다. 영양왕( 陽王) 9년인 598년에 고구려는 말갈병(靺鞨兵)을 동원하여 요서를 먼저 공격했다. 수의 문제(文帝)는 이에 격노하여 다리우스1세가 그랬던 것처럼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원정한다. 그러나 1차 그리스 원정 때의 페르시아군처럼 산동반도를 출발해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수군(水軍)이 태풍을 만나 전멸하는 꼴을 보게 된다. 마라톤에서 대패했던 것처럼 육전에서도 수나라 군대는 요동벌판에서 고구려군에게 깨졌다. 고구려 정복의 숙원은 문제의 아들 양제(陽帝)에게 물려졌다.
이와 아주 유사하게 천년 전에 1·2차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다리우스1세는 그 비원을 아들인 크세륵세스(Xerxe)에게 넘기고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다. 부왕의 유지를 받든 크세륵세스는 수의 양제가 그랬던 것처럼 선왕보다 더욱 철저하게 전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크세륵세스 역시 부왕이 통일한 천하의 안정에도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기원전 539년에 선대인 캄비세스왕 때 굴복했던 바빌론 왕국이 기원전 482년에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옛 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불타고 유서 깊은 성곽들은 무너졌으며, 폭도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당시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호화스러웠다는 마독신의 신전이 폐허로 변한 것이 이때였다. 바빌론의 봉기를 잠재운 크세륵세스는 2년 후인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 원정군을 일으켰다.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수륙병진책을 택했는데 차이점은 1차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군이었다는 점이다. 육군만 18만 명이었고, 동원된 전선(戰船)은 주력함이 길이가 약 50미터에, 너비가 5.5미터 정도였으며 160명이 노를 저어 움직였고 30명 내외의 전사가 승선했던 3단노의 갤리(Galley)였다. 갤리를 주축으로 한 크고 작은 전선 1,300척에 탑승한 병력은 모두 17만5천명이었다. 육지와 바다를 합해 3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기원전 5세기에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했다. 유럽이 이런 대규모 침공을 다시 받은 것은 이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1453년에 오스만터키의 술탄이 동로마를 침공하기 전에는 이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다시 5백년이 지난 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게 된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어 전 그리스의 영웅이 된 밀티아데스는 승리를 기념하는 올리브나무 가지관을 자기가 수여받을 수 있도록 민회에 요청하였으나 아테네 시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아테네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한 개인에게 너무 지나친 영광이나 권위가 쏠리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것이 아테네의 민주정을 지탱시킨 힘이었다. 오늘날에도 교훈이 될만한 점이다.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승리의 다음해에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파로스섬을 원정하다가 실패하고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결국 벌금형으로 감형되기는 하였으나 파로스섬 원정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만다. 마라톤전투의 영웅으로서는 초라하고 불명예스러운 최후였다.
아테네의 새로운 실력자는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고대 희랍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로 알려진 그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건설이 절실하다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군으로 서해의 제해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과 같다. 그리고 다행히도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의 은광을 발견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은을 모두 군선의 건조에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갤리선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약 300척 가까운 수가 되었다. 물론 크세륵세스 왕의 1,300척에 비하면 엄청난 열세였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헬레스판트(오늘날의 다다넬스 해협)를 건너 거대한 전차가 굴러가듯이 그리스의 주변 도시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면서 트레이시와 마케도니아를 휩쓸며 전진했다.

↑제3차 그리스 원정시 페르시아군 진격로
그리스는 또 다시 전율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손을 잡고 이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기로 했다.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니다스였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제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수스는 평소에는 라이벌이며 숙적이었다. 스파르타의 일반 국민들은 정서적으로 아테네를 도와 전쟁을 한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대군이 아테네를 정복하면 다음 차례는 스파르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레오니다스 왕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얻으니 신전의 무녀는 무시무시한 신의 예언을 노래했다. "왕이 죽으면 스파르타가 살 것이요,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가 멸망할 것이다." 신탁을 들은 레오니다스는 자신이 죽어 스파르타를 구해낼테니 용사들을 달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원래 스파르타군의 용도는 국내 노예들에 대한 억제와 진압이었지 아테네처럼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원정군이 아니었다. 스파르타군은 건국 이후 한번도 국경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군대였다. 그들의 적은 자기들 발 밑에 있었지 국경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파르타 국민들이 참전을 꺼린 이유는 군대가 외국에 나간 사이에 국내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웠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간곡한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왕이 데리고 갈 수 있는 스파르타군은 겨우 3백명뿐이었다. 레오니다스왕은 이 정예의 용사 3백명을 인솔하여 아테네로 향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군의 총대장이 되지만 실제적인 전투의 지휘는 스파르타가 맡는 것에 양해를 했다. 육군의 지휘는 레오니다스왕이, 해군의 지휘는 역시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가 맡았다. 문제는 한줌밖에 안 되는 그리스 동맹군을 가지고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였다. 다행히 남하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협곡이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어서 이름이 '테르모필레'였다. 왼쪽은 험준한 테살리산, 오른쪽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의 해안이었다. 길은 외줄기 절벽을 낀 협소한 한줄기 도로뿐이었다. 우회할 길도 병력을 펼칠 공간도 없었다.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군 300명과 아테네의 동맹군 7,000명을 가지고 이 곳에서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크세륵세스는 협곡의 입구에 도착해서 대군을 벌려놓고 동맹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5일을 기다렸다. 그리스동맹군이 출격하면 페르시아군이 쏘아대는 화살이 하늘을 가렸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탐색차 출격했다가 돌아온 장병들에게서 이 말을 들은 스파르타의 장군 데오게스는 "잘 되었군 화살이 해를 가려주면 시원하게 싸울 수 있으니 말이야."하고 태연자약했다. 델포스 신전의 신탁을 들은 레오니다스를 따라 온 스파르타군은 이미 살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죽어 스파르타를 구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명랑해협에서 열두척의 판옥선으로 5백척의 왜선을 가로막고 나섰던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심정이 이때의 스파르타군과 같았을 것이다.
동맹군이 항복하지 않자 6일째 되는 날부터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형상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낭떠러지 위의 좁은 길에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동맹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테네군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긴 장창을 내밀고 발소리를 착착 맞추어 전진해서 페르시아의 경보병들을 산적처럼 창에 꿰어 바다로 던져버렸다. 오른편의 바다에도 페르시아의 함대가 나타났다. 육지에서는 좁은 협곡을 이용해서 적을 막아도 해군을 이용한 적이 협곡 뒤편에 상륙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이때 테미스토클레스가 선견지명으로 육성한 그리스의 함대가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아섰다. 바다도 왼쪽의 육지와 오른쪽의 에우보에아 섬 사이의 좁은 수로였다. 마치 임진왜란 때 명랑해협에서처럼 페르시아 함대가 수의 이점을 누리기 어려운 바다였다. 크세륵세스는 바다에서의 결전을 명령하지 않았다. 육지의 낭떠러지에서 혈전이 되풀이되는 동안 빤히 내려다보이는 바다에는 양국 함대가 늘어선 채 대치했다. 레오니다스의 동맹군은 바다 위에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양국 해군의 눈앞에서 사투에 사투를 거듭했다. 협곡 아래의 바닷가 절벽에는 양군의 시체가 떨어져 겹겹이 쌓여갔다. 사기와 훈련, 용기와 애국심, 그리고 충성에서 동맹군이 페르시아군을 압도했다.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을 막아내는 그리스 동맹군
테르모필레의 협곡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크세륵세스는 병사들을 풀어 테살리산을 넘어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게 했다. 테르모필레의 싸움이 시작된 지 7일째 되는 날 한 그리스 농부가 상금을 탐하여 테살리산을 넘는 산길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산을 넘어 협곡을 지키는 동맹군의 뒤로 쏟아져 내려왔다. 레오니다스는 자기가 데리고 온 3백 명의 스파르타군만을 남기고 아테네의 동맹군들을 전원 철수시켰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물러가는 동맹군의 후위를 지키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섰다. 산을 넘어온 페르시아군은 몇 만 명인지 수를 셀 수도 없었다. 몇 만 대 삼백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테르모필레는 스파르타인의 무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기념비가 되었다. 단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깨끗이 버린 3백 명은 몇 만의 적에 둘러싸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다. 인간이라기보다 아귀가 된 듯한 모습을 그들은 보였다. 창이 부러지면 칼로, 칼도 부러지면 돌을 들어 적을 쳤고, 돌마저 없으면 이빨로 물어뜯었다. 크세륵세스왕은 이 스파르타군의 분투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스파르타인 전사가 대지에 쓰러져 꿈틀거림을 멈추자 크세륵세스왕은 레오니다스왕의 시체를 찾게 하여 그 목을 벤 후에 장대에 높이 매달았다. 장대에 매달린 레오니다스왕의 머리가 내려다보는 테르모필레의 협곡길을 지나서 페르시아군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묵묵히 진군해 갔다. 레오니다스왕의 머리를 보고 결의와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리스의 함대도 뱃머리를 돌렸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사람들은 테르모필레의 협곡에 스파르타의 3백 용사를 기념하여 큰 비를 세웠다. 그 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길손이여,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 다오. 우리들은 조국을 지키다가 여기에 잠들었노라고."

↑스파르타(좌)와 페르시아(우)의 전사
# by | 2006/07/25 16:06 | Oriental Studi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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