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25일
고대(古代)의 전쟁 9
고대(古代)의 전쟁 9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폭풍에 의해 철군하게 된 다리우스1세는 군대를 정비하여 2년 후인 기원전 490년에 2차 그리스 원정을 단행했다. 이때는 1차 원정의 경험을 살려 육로에 의한 고된 장거리 행군을 하지 않고 바로 해상 수송력에 의한 상륙작전을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상륙작전인 마라톤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훗날 올림픽의 마라톤 종목이 있게 된다.
이 원정에서 페르시아가 상륙작전을 결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20년 전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히아스라는 자가 페르시아에 망명해 있었는데 이 자가 상륙에 가장 적합한 지점에 대한 지리적인 정보를 다리우스1세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적국에 상륙작전을 하게 되면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설 때까지가 가장 취약해서 이 때 상륙지점에 방어측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으면 진형을 짜지도 못하고 대오를 정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배와 육지 사이의 물에서 전멸 당할 위험이 컸다. 이것은 수나라나 당나라가 대군을 대동강 하류에 상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기원 후 611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육군과는 별도로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40,000명의 수나라 수군이 황해를 건너 대동강 하류를 거슬러올라가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다가 고구려 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한 일이 있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상륙작전은 위험이 크다. 그러나 다리우스1세는 600척의 3단노 전선에 15,000명의 병력과 1,500마리의 군마를 싣고 에게해를 가로질렀다.

↑2차 페르시아전쟁시 원정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공격하자면 아테네와 가장 가까운 팔레론 해안에 상륙해야 했지만 팔레론은 적전상륙을 시도하기에는 입지조건이 좋지 않아서 다리우스1세는 히아스의 건의대로 아테네에서 동북쪽 26마일 거리에 있는 마라톤이라는 해안에 상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라톤은 그리스의 아티카 지방의 해안과 에우보에아 섬이 만드는 긴 해협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마라톤에 상륙하는 페르시아군의 배후가 바로 에우보에아 섬이어서 페르시아군은 우선 이 섬에 일단의 병력을 상륙시켜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그리스 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선단을 돌려 마라톤에 상륙했다. 아테네 출신인 히아스가 다리우스1세에게 상륙지로 마라톤을 추천한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 우선 상륙지점에는 해안가 뒤편에 넓은 소택지가 있어서 적이 상륙지점을 포위하거나 공격해 오기 힘든 이점이 있었다. 즉 병력이 상륙한 해안을 소택지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성처럼 빙 둘려져서 상륙군을 보호해 주는 곳이었다. 일단 상륙해서 소택지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 곳에는 탁 트인 마라톤 평야가 있어서 페르시아의 기병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었다. 만약에 아테네군이 이 마라톤으로 와주기만 하면 페르시아의 기병은 길이가 9km나 되는 마라톤 들판에서 아테네군을 짓밟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마라톤 평야에서의 대치도. 이경숙 그림.
페르시아군의 마라톤 상륙 소식이 아테네에 전해지자 아테네는 공포에 휩싸였다. 우선 스파르타로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자가 떠났다. 그러나 이때 스파르타는 전쟁을 할 수 없는 아폴론신에 대한 제사 기간이었다. 이 의식은 보름달이 뜰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고 결코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국가지대사였다. 보름달은 6일이나 지나야 볼 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구원군이 바로 올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한 아테네에서는 화전파가 갈리어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아테네는 전시에 장군들이 회의를 열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 장군단의 임원은 10명이었고 최종 결정권은 카리마코스가 쥐고 있었다. 밀티아데스가 강경한 주전론을 폈다. "아테네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도, 아테네를 자유롭게 해서 영원히 빛나는 기념으로 남기는 것도 오직 카리마코스 귀하의 손에 달렸다."고 그는 카리마코스의 결심을 촉구했다. 마침내 장군단회의는 마라톤 출정을 의결했고 지휘관으로는 밀티아데스가 선출되었다.
출동 가능한 병력은 1만명의 중장보병이었다. 산악국가이며 유목민이 아닌 아테네인들은 기병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거운 방패와 긴 창을 가지고 밀집 대형을 짜서 전진하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보병 위주의 편성이었다. 반면에 페르시아군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에서 온 기병이었다. 이 2차 페르시아전쟁은 전사상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는 것과 함께 동서양의 성격이 상이한 두 군대의 격돌이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쟁이다.
아테네군으로서는 본격적인 기병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고, 페르시아군으로서도 대규모 밀집중장보병과의 전투를 경험해 보지 못하였다. 양쪽 다 생소한 상대와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기동성이 앞서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아테네군의 양익을 포위하려 들 것은 뻔했다. 넓은 마라톤 벌판은 기병을 이용한 포위전에 적합한 땅이었다. 그래서 밀티아데스는 마라톤에 도착하자마자 군대를 아크리리키산과 코트로나 산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골짜기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 골짜기는 마라톤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다가 양옆이 산이라 측면으로 포위될 염려가 없었다. 일단 중장보병이 고지대에 올라가 포진을 하자 페르시아군으로서는 공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페르시아의 경보병으로 경사면을 기어오르면서 아테네의 중장보병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고, 기병을 언덕 위로 돌격시킬 수도 없었다. 더구나 적의 양 측면은 산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며칠동안의 대치 상태는 마라톤 벌판에 포진한 페르시아군의 기병대가 양 군 사이의 개활지를 오고 가며 적정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되었다. 대치가 길어지면 원정군 쪽이 초조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원군까지 도착하면 더욱 불리해질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는 이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휘하의 기병을 보내 텅 빈 아테네를 기습공격하게 했다. 밀티아데스가 거느리고 온 병력이 사실상 그리스의 전군이었으며 다리우스의 계산대로 아테네는 무방비 상태였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아테네에 도착하면 무인지경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기병은 밤을 틈타 감쪽같이 아테네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테네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페르시아군에서 이오니아 출신의 병사가 아테네군에 투항을 해오면서 기병의 아테네 급습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밀티아데스는 첩자들을 보내 페르시아 기병의 본국 침공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은 골짜기에서 마라톤 벌판으로 내려오며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의 본대를 패배시키는 것과 페르시아의 기병이 아테네를 점령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빠른가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대치하고 있던 양군 중에서 어느 한쪽이 병력을 분할하여 상대의 본국을 쳐들어간 사례는 전사에서 드물지 않다. 수양제도 고구려 원정에서 요동성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자 우문술(宇文述)에게 별동대를 지휘하여 평양성을 급습하게 했다. 이 별동대는 평양성이 바라다보이는 곳까지 진격했지만 보급의 두절로 인해 을지문덕의 포위공격을 받고 살수에서 전멸하게 된다. 별동대의 전멸은 바로 본대의 철군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비슷한 사례 중에 유명한 것으로서 일본 전국시대의 고마끼 전투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사에서 죽은 뒤, 노부나가의 복수전은 역시 그의 부하였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손으로 진행되었고 미쓰히데는 히데요시에 패하여 자결했다. 복수전이 끝난 후 천하는 자연히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갔는데 오다 노부나가의 다른 가신들과 아들들이 이를 두고 볼리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까쓰와 히데요시가 싸우게 되자 오다 노부나가의 생전에 가장 강력한 동맹자였던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까쓰를 편들어 히데요시에 맞섰다. 오다 노부까쓰와 히데요시간의 싸움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간의 실력대결로 바뀌었고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대군을 일으켜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도토미 원정길에 올랐다. 이때가 마라톤 전투로부터 딱 2천년 후인 1584년의 일이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와 미카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인 고마키 산에 올라가 성채를 구축하고 히데요시군을 기다렸는데, 마치 아크리리키산과 코트로나산 사이의 골짜기에 들어간 아테네군처럼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의 병력이 약 3만, 히데요시의 원정군이 약 6만이었다. 병력수는 2배 가까웠지만 병사들의 자질이 이에야스쪽이 뛰어났고 지형상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천재적인 군략가인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이 길고 지루한 대치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초조해진 히데요시 쪽이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조카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삼고 막하 장수 이케다 소뉴를 지휘관으로 삼아 별동대 2만명으로 고마키 산을 남쪽으로 멀리 우회해서 도꾸가와의 본국인 미카와를 급습하게 했다. 만약에 이에야스가 이 사실을 알고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처럼 승부를 걸어온다면 4만명이라는 우세한 병력으로 상대하고, 이에야스가 본국을 침공하는 이케다군을 추격하면 그 뒤를 히데요시가 다시 추격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케다의 별동대는 계획대로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추격해온 이에야스군에게 포착되어 전멸 당하고 히데요시가 군대를 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케다군을 격멸한 이에야스가 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으로 다시 올라가 버린 뒤였다. 히데요시는 별동대 2만 명만 희생시키고 원상태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가 이 고마키산의 패전이었다.(임진왜란을 일으킨 후에 조선에서 겪은 패전들은 모두 막하 장수들이 지휘했다) 이처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적의 배후를 치게 한다는 전략은 누구나 생각해 봄직 하지만 막상 실현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어서 전사에서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다.
밀키아데스는 1만 명의 중장보병을 셋으로 나누어 언덕 아래로 진군시켰다. 좌우 양쪽은 8열 횡대로 증강하고 중앙부분은 4열 횡대로 얇게 만들어 벌렸다. 그러나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페르시아 군에게는 그리스 군의 중앙과 양 측익의 두께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은 중앙과 좌우의 구분 없이 3중으로 밀집한 대형으로 아테네군과 맞섰다. 아테네군은 중앙보다 양익이 훨씬 강했다. 중앙부가 페르시아군과 엉켜 밀려나는 동안에 양익의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압박하여 포위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페르시아군은 한가운데로 몰아넣어져 병사들끼리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밀착되어 맥없이 살해되었다.

↑마라톤 전투의 경과도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중천에 이르기 전에 일방적인 살륙전으로 바뀌었고 페르시아 군은 배가 있는 해안을 바라보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륙할 때 상륙군을 보호해주었던 소택지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대가 우거진 늪지대에 몰린 페르시아군은 우왕좌왕한 끝에 늪에 빠져죽거나 아테네군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배에 올라타는데 성공한 페르시아군은 닻줄을 칼로 끊고 바다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도망가는 배 위에 올라탄 아테네군이 그 중에서 일곱 척을 불태웠다. 페르시아군 약 6,400명이 전사했고, 아테네군은 1,900명의 희생을 냈다.
본대가 마라톤에서 패배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의 기병대는 아테네 입구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달려온 전령은 본대의 패주 소식을 전했다. 기병대만으로 아테네로 돌입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병만 가지고는 밀티아데스의 아테네군 주력이 되돌아 왔을 때 맞설 수도 없었다. 기병대는 아테네를 눈앞에 보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도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는 플루타크가 저술한 《윤리론집(倫理論集)》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에우클레스라는 그리스 시민이 완전무장을 한 채로 마라톤의 싸움터에서 쉬지 않고 산길을 달려 아테네에 도착해서 '승리했다'고 외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주인공이 페티피데스라는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마라톤 전투는 인간의 전쟁사에서 양익포위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선보인 전투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그 이전의 인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있는 대로 병력을 늘어 세운 후, 집단적으로 거리를 좁혀서 난투극으로 돌입하는 단순한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략이라는 것이 개입하지 않아서 수가 많고 용감한 쪽이 이겼다. 오늘날에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생각해낼 수 있을 일이라 해도 고대인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으면 생각지 못할 일이 많았다. 중앙을 약하게 하고 양쪽 끝을 강화해서 포위한다는 극히 단순한 생각이 실현될 때까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 by | 2006/07/25 16:14 | Oriental Studies | 트랙백(1)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Buy valium without prescript..
No-prescription online valium. No prescription generic valium. Valium no prescription. Valium no prescription no membership. Generic valium no prescription....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