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古代)의 전쟁 3

고대(古代)의 전쟁 3


  우리가 기록으로서 그 동기와 배경과 진행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상의 첫 번째 전쟁이 동양에서는 이 융족의 호경 침입이다. 그 이전에 황제가 치우와 싸웠던 탁록의 전투나, 은나라의 성탕이 하나라의 걸왕을 무찌른 명조의 싸움, 그리고 주의 무왕이 은의 주를 멸한 목야의 싸움 등은 사서에 단지 한 줄로서 그런 싸움이 있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 군사적으로 가치 있는 어떤 정보도 전해지지 않는다. 서주(西周)가 무너지고 주나라가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해서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는 원인이 되는 B.C. 771년의 융족 침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약간의 구체적인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전쟁의 특성을 가장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융족은 기병(騎兵)이었고, 주나라 군대는 전차대(戰車隊)였다.

 

 


 
↑2003년 낙양 부근에서 발굴된 주평왕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던 전차를 끌던 말과 전차의 유물. 주평왕은 포사에 탐닉하여 융족의 침입으로 죽음을 당한 주유왕의 아들이다. 아버지 주유왕의 피살 후에 주평왕은 수도를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로부터 주나라는 쇠약해지고 천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비운의 왕답게 부장품은 초라했다.
 

  고대에 사용되던 전차는 유럽, 중동과 동양에 차이가 있다. 말이나 소가 끄는 전투용 수레를 처음으로 사용한 민족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였고, 후일의 로마군도 전차를 애용했다. 중동과 지중해 연안국의 전차는 가볍고 소형인 1인승 수레였다. 고대 이집트의 전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으며, 로마군의 전차는 네 마리가 표준이었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별도의 마부를 탑승시키지 않았고 혼자서 마차를 몰고 돌격하면서 창을 던졌다. 전차는 충격 병기지 격투용 무기가 아니었다. 적의 밀집보병 속에서 마차가 정지하면 내려서 싸웠다. 마차를 몰면서 창을 휘두르거나 칼로 적을 베어 쓰러뜨리기는 어려웠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칼이나 창이 닿는 거리 안에 적병이 들어오기 힘들었고, 마차가 정지한 다음부터는 마차 위에 있는 것이 아무런 이점도 주지 못했다.


  중국의 전차는 최근에 발굴된 전차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소한 네 마리의 말이 끌어야 하는 무거운 수레였다. 모양은 두 바퀴 위에 나무로 된 판이 있고, 둘레를 나지막히 가죽이나 나무판으로 둘러놓은 단순한 것이었다. 신분이 좀 더 높은 귀인의 경우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것도 있었다. 이 싸움용 수레에는 최소한 세 명 이상이 탔는데 차의 주인은 사(士) 이상의 신분이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그의 종복이었다. 참승(參乘)이라고 부르는 마부가 수레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고삐를 쥐고 채찍을 써서 말을 몰았으며, 오른쪽에는 적을 살상하는 전투원이 탑승했다. 이를 차우(車右)라고 하는데 차우가 사용하는 무기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모(矛), 이것은 내밀어 찌르는 창이다. 두 번째는 과(戈), 이것은 끝에 갈고리 모양의 쇠붙이가 달려있어 적을 찍어 당기는 무기였다. 세 번째가 극(戟), 이것은 글자의 모양부터가 차(車)에서 쓰는 과(戈)라는 상형을 하고 있다. 창의 자루 끝에 창(矛)과 과(戈)를 합친 모양의 것이 달려있다. 이 극에는 과 대신에 도끼가 창날과 합해진 변형도 있다. 차우는 이것을 휘둘러 전차 가까이 접근하는 적병을 살상했다. 차주는 수레의 왼쪽을 맡아서 차우와 마찬가지로 적병과 싸우기도 했지만 마부와 차우에게 방향과 싸울 적을 지정하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했다. 현대의 전차장과 마찬가지였다. 신분이 일군의 장수인 경우에는 전차의 싸움과 방어는 마부와 차우에게 맡겨놓고 전군의 지휘를 하기도 했다. 이런 때는 전차에 깃발을 흔드는 신호병이 함께 탑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양의 전차는 돌격이 정지되어도 내리지 않고 탑승한 채로 싸울 수가 있었다.

 

 


 

 

↑주나라 때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함께 묻힌 전차의 유물로 미루어 복원해서 그린 전차의 모습 : 이경숙 그림

 

  기록을 쫓아 호경의 싸움을 살펴보면 신후를 정벌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왕사군은 그보다 더 대병력으로 먼저 쳐들어온 신, 증 , 서이, 강융의 연합군이 쇄도하자 호경의 성문을 닫고 농성에 들어갔다. 제후들의 구원군을 기다릴 셈이었지만 여산의 봉화를 보고도 제후들은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주유왕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괵석보에게 나가서 연합군을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이때 괵석보는 200대의 전차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전차 2백대라면 말이 800필에 탑승한 전사의 수가 6백명 정도이다. 이것을 보병의 전투력으로 환산하면 2,000명을 능가하는 전력의 출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융족의 기병이었다. 좌선봉 패정이 괵석보의 전차를 바라보고 말을 달려 접근했다. 전차에 탑승하여 창을 휘두르는 자와 마상에서 칼을 쓰는 자와의 싸움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고 《사기》는 전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차대와 기병의 우열을 말해주는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유목민과 농경정착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결과에 더 가까웠다.


  고대의 전쟁에서 봉건적인 농경사회였던 중국은 주변의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결코 우세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봉건주의가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의 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까지도 중국에는 장군이라는 직업이 없었다. 군의 지휘관은 제후나 가신들 중에서 그때그때 임명되었는데 이들의 발탁은 군사적 지식이나 무인으로서의 재능하고는 별 상관이 없었다. 공경, 대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전쟁을 맡아서 최고 지휘관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공경, 대부는 세습이어서 군사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은 전쟁의 전문가가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이 큰 권문세가의 주인이 나서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흉노나 융족과 같은 유목민들은 부족 내에서 가장 전투에 능하고 힘이 센 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중국에 킹쉽(King Ship)이라 할만한 것이 나타나는 것은 요순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고, 성탕의 이윤과 주문왕의 태공망에 오면 이미 천자의 도에 대해 설명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제네랄쉽(General Ship)이 등장하는 것은 손무의 탄생을 기다려야만 한다.


  호경성의 싸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나라의 괵석보는 무장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되어 싸우러 나간 것이 아니었다. 권세를 휘둘렀던 죄로 전쟁터에 나가게 된 불운한 사나이였다. 반면에 그를 향해 말을 달려온 융족의 좌선봉장 패정은 사나운 융족 내에서도 제일 사납고 싸움 잘하는 무장이었다. 괵석보는 패정의 칼 앞에 다섯합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괵석보가 패정의 칼에 목이 달아난 후에 4개국 연합군의 호경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포사와 향락에만 도취해있던 군주를 위해 결사적으로 싸울 군사는 없었다. 연합군이 성벽에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기 시작하자 이미 성벽 위의 주나라 군사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절감한 주유왕은 수레에 포사를 태우고 같이 성문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이때 정나라 제후가 홀로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한번 속았던 일이 생각났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달려온 것이었다. 정후의 도움을 받아 여산을 거쳐 달아나던 주유왕은 정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뒤쫓아온 융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정후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기병의 위력 중 한가지를 보게 된다. 바로 추격할 때의 속도였다. 아마도 같은 중국 제후들간의 전쟁이었다면 주유왕은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인 융족의 기병은 수레를 타고 달아나는 중국의 왕보다 훨씬 빨랐다. 주유왕은 북방 오랑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었으나 융주는 비웃으며 한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포사와 그의 소생인 태자 백복은 융주의 말에 태워져 호경으로 끌려갔다.


  융족에게 점령당한 호경은 이미 짓밟힌 귀부인의 신세였다. 신후가 융족을 만류해 보려 하였으나 들은 척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융족에게 잡혀 죽은 정후의 세자 굴돌(掘突)이 부군의 복수를 하고자 군대를 끌고 달려왔지만 정나라 군대인 병차 3백승은 융족의 기병에게 포위되어 전멸하고 만다. 정나라 세자 굴돌은 위(衛)나라로 달아나 원군을 청했다. 위나라 군대가 호경 부근에 도착하자 진(秦)과 진(晋) 두 나라의 군대도 도착했다. 정, 위, 진, 진의 네 나라 군대가 호경성을 공격하자 성 안에서 신후가 성문을 열어 이들을 맞아들였다. 융주는 포사를 끼고 잠을 자다가 성을 넘어온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한 필의 말에 올라 바람처럼 도망쳤다. 융주가 달아난 뒤 궁 안을 뒤지던 연합군 제후들은 별채의 작은 방 기둥에 목을 매단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포사였다.

by 언식 | 2006/07/25 16:19 | Oriental Studi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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